...[2003. 10. 21 경향신문 ] 조선선비의 삶을 엿보다
...관리자 2004-09-29 19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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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인’ 조선선비의 삶을 엿보다


=국립중앙박물관 ‘성리학의 세계’ 특별전=

#퇴계 이황은 별세하기 나흘 전 가족에게 유언을 남긴다.
“조정에서 성대한 장례를 치르려고 하거든 사양하라. 비석도 세우지 말고 단지 조그마한 돌에다 ‘퇴도 만은 진성이공지묘’(退陶 晩隱 眞城李公之墓)라고만 새기고 내가 초를 잡아둔 묘지명을 쓰도록 하라”. 사후 퇴계의 묘소 앞에는 자그마한 비석이 놓였다. 거기에는 ‘태어나서는 크게 어리석고, 자라면서 병치레가 많았네’로 시작되는 퇴계의 자찬묘지명이 새겨져 있다.


#율곡 이이는 참봉 최운우라는 사람에게 보낸 편지를 통해 서울 벼슬살이하는 선비의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담아냈다. “저는 병든 몸으로 가을을 만나니 고향생각이 더욱 간절합니다. 벼슬에 대한 뜻마저 날로 없어지니 아마도 서울에 오래 머무를 수 없을 듯합니다. 어찌하면 서로 만나볼 수 있을까요”


#다산 정약용은 28세 때 문과 과거시험에서 장원을 할 정도로 수재였다. 그러나 규장각에 들어가 엘리트 그룹인 초계문신(抄啓文臣)을 대상으로 치른 한 시험에서는 80점을 얻어 4위에 머물렀다. 1위는 이기경(81.5점), 2위는 윤영희·김희순으로 나란히 81점.


조선시대 대표적 성리학자였던 이황과 이이, 정약용의 삶과 생각을 엿볼 수 있는 장면들이다. 여기에 비친 모습은 모두 근엄한 성리학자가 아닌 자연인으로서의 퇴계, 율곡, 다산이다.


지난 21일부터 국립중앙박물관에서는 조선의 역사와 문화에 큰 영향을 미친 성리학을 재조명하는 ‘조선 성리학의 세계-사유와 실천’ 특별전이 열리고 있다. 주제만 보고 ‘이기설’, ‘사단칠정론’과 같은 철학적인 전시를 생각한다면 오산이다.


전시장을 둘러보면 조선시대 선비들의 일상의 삶과 생각을 확인할 수 있다. 박물관측은 성리학이라는 주제를 따르면서도 개별 성리학자의 특징을 부각시키면서 일반인도 어렵지 않게 관람할 수 있도록 배려했다.


먼저 눈에 띄는 것은 성리학자들의 초상화이다. 안향, 이제현, 이색, 정몽주, 주세붕, 이황, 이이, 이재, 서직수, 김장생, 허목, 윤집, 박세당, 윤휴, 정약용 등 20명 가까운 성리학자들의 영정을 내놓았다. 고려말~조선 후기에 걸친 명현거유들로 인물만으로도 성리학의 흐름을 파악할 수 있다. 이처럼 많은 옛 초상화가 전시되기는 1970년대 초 100여점이 출품된 ‘초상화 특별전’ 이후 처음이라는 게 박물관측의 설명이다.


국보 239호인 송시열 초상을 비롯, 안향·이제현·정몽주·주세붕 등의 초상화는 교과서에서 사진으로나 볼 수 있는 귀한 유물들이다.


선비의 생각과 체취를 느끼려면 편지 등의 유묵이 좋은 자료다. 이황, 이이, 남명 조식의 초서 서간과 함께 송준길, 정경세의 한글편지가 눈길을 끈다. 이황의 자찬묘지명을 새긴 묘비의 탁본과 미수 허목의 서첩, 중국의 전각을 베낀 정약용의 유묵, 조선 후기 노비매매문서도 함께 전시된다.


충청도유생상소문에서는 유림들의 대쪽 정신을 확인할 수 있다. 폭 1m20, 길이 12m에 달하는 장문의 상소문에는 만동묘 철폐의 부당성을 역설하며 다시 세울 것을 요청한 충청도 유생 720명의 명단이 서명자의 수결(手決·사인)과 함께 적혀 있다.


이와 함께 화개현구장도(이징 작·보물 1046호), 도산서원도(작자 미상·보물 522호), 묵죽도(허목 작), 죽도(조익 작) 등 그림과 복숭아꽃, 버드나무까지 채색을 넣어 세밀화로 그린 전라도 무장현(현 고창읍)의 지도 등도 볼 만하다. 출품 유물은 모두 240여점으로 관람자의 이해를 위해 유물마다 상세한 해설을 붙였다. 전시는 11월30일까지. (02)398-5077


〈조운찬기자〉



입력: 2003년 10월 21일 18:20:44 / 최종 편집: 2003년 10월 21일 18:45: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