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 12. 20 중부일보] 2. 주경야독으로 일군 박세당(朴世堂)의 실학정신(2/3)
...관리자 2004-12-20 1718  
 

2. 주경야독으로 일군 박세당(朴世堂)의 실학정신
"에잇, 퍽! 에잇, 퍽!"
박세당 선생이 십자형틀에 묶여 엎어진 상태에서 두 명의 포졸이 번갈아 내리칠 때 이와같은 곤장을 맞는 소리가 났을까.
죄목은 단지 벼슬길에 나오라는 임금의 부름을 받지 않은 이유로 장형 50대를 받게 된다. 늙은 몸에도 불구하고 장형을 감내하면서 까지 벼슬길을 마다한 까닭을 누가 알까마는 이미 그때 서계 선생의 마음 속은 누구도 꺾을 수 없는 신념이 살아 있었음을 보인 증거라 하겠다.
그렇다면 그 신념은 어디서 생기는 것일까? 그토록 쓰라린 고통을 이겨낼 수 있는 힘은 어떻게 생겼는지, 출세와 명예, 부귀영화가 모든 사람들이 희망하는 것임에도 이를 헌신작 보듯 한 이유가 자못 궁금하다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이따금 역적 운운하면서 많은 선비가 죽어 감으로써 '잘되면 충신이요 못되면 역적'이라는 풍자가 나오기도 하였지만 이는 붕당정치의 무상함을 말해주기도 한다.

서계선생은 바로 이점을 냉철하게 꿰뚫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수락산 석천동을 택한 후 다음세상을 준비한 것이다. 그리고 손수 논밭을 갈아가며 농산물을 수확하여 생계를 유지하고 밤이면 백성의 삶을 위하여 잘못된 관행을 바로 잡도록 독서하며 저술에 몰두하는 등으로 일평생을 보냈다.

서계 박세당 선생은 1629년 인조 7년부친 정사공신(靖社功臣) 박정(朴柾)과 모친 양주 윤씨 사이에서 4형제 중 막내아들로 태어나 유복한 가정에서 자랐다. 그 후 1632년 인조반정에 공을 세운 부친이 조부보다 앞서 운명하면서 집안에 계속 우환이 생기고 1636년에 병자호란이 일자 할머니와 어머니를 따라 남쪽으로 피난길에 올라 고난의 시기를 겪는다.

1645년 의령 남씨의 규수와 혼인을 맺고 10년을 처가살이하며 과거 시험을 준비한다. 1660년 1차 과거에 급제한 선생은 다음해에 증광별시에서 당대의 수재들을 제치고 영예의 장원으로 급제한다.

32세의 나이에 장원을 한 선생은 관례에 따라 정6품인 성균관 전적(典籍)에 임명되어 관계에 화려하게 입문한다. 무려 5계단을 뛰어넘은 선생은 이후 예조,병조의 좌랑,춘추관 기사관, 사간원 정언등 중앙의 요직을 두루 거쳤다. 특히 사간원 정언 시절에는 이도(吏道)쇄신을 위한 가차없는 소신과 강단을 발휘하여 젊은 관료로서의 명망을 떨쳤다.

1664년에는 청나라 사신을 영접하는 문제로 조정이 술렁인 사건이 벌어졌다. 중신 김만균이 그의 할머니가 병자호란때 순절했기 때문에 영접행사에 참석치 못하겠다는 상소문이 논란이 된다. 이 당시 조정은 개인적인 의리가 우선이냐, 공직자의 도리가 우선이냐가 대립하여 찬반이 갈렸었다. 명나라와의 의리를 중시하고 청을 멀리하였던 우암 송시열 계열에서는 김만균을 적극 옹호하였지만 현실의 실리외교를 중시하던 서필원 계열의 중신들은 김만균의 사사로운 의리를 용인할 수 없는 오만이라 하여 지탄하였다. 서필원의 주장에 동조하였던 서계 선생은 우암계열로부터 '삼간(三奸) 오사(五邪)'의 한사람으로 지목되어 관계에 몸담아 온 이래 처음으로 수모를 당하고, 공리공론에 얽매이고 극한 논쟁에 휘말리는 정치적 현실에 염증을 느끼게 된다.

1666년 현종(顯宗)이 온천욕을 좋아해 자주 왕궁을 비워 막대한 재정을 소비하자 민폐를 끼치는 것이라며 자제할 것을 간언하기도 했다. 이듬해에는 국왕과 대신의 직무태만을 들어 왕실의 재물낭비 등을 꺼리낌없이 거론하고 국정쇄신을 직언하였다. 그러나 왕실은 변하지 않고 조정은 당파로 갈려 혼란스러웠다.

서계선생은 더 이상 조정에서 국론을 펼 가치를 못 느꼈다. 1668년 벼슬을 놓고 양주 수락산 자락에 있는 석천동에 은거하며 학문과 저술에 전념하였다. 이후 수십차례에 걸쳐 임금의 부름과 관직이 내렸고 급기야 이조판서 좌참찬, 판중추부사 등에 임명되었지만 부임하지 않았다. 단, 1668년 성절사 서장관으로 청나라 문물을 보고 온 것과 1670년 외직인 통진현감을 1년간 하면서 민생을 살핀 것이 전부이다.

서계선생은 일찍 부모를 잃고 조부모로 부터 엄격하게 교육받은 일과 벼슬하기 전 처가살이 등 많은 고생을 겪고 마침내 유학을 익히고 과거시험에 장원하여 관계를 진출함으로서 성군정치의 이상을 실현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현실의 벽은 너무나 두꺼웠다. 조정은 오로지 주자학설만을 고집하는 중신들의 최고인 양 거드름을 피우고, 백성의 삶은 궁핍을 벗어나지 못하고 전전긍긍하니 관로로서 봉록을 축내고 있음을 어찌 모를 것인가?

1668년 불혹의 나이를 맞아 서계선생은 양심선언을 하듯 일생일대의 중대한 결심을 하고 은거를 작정한 것이다. 이는 공자의 가르침인 "안으로 흔들림 없는 마음을 바로잡고, 밖으로 성인의 말씀을 실천함에 주력한다."는 뜻인 주충신(主忠信)을 그대로 실행하는 군자다운 결정으로 보인다. 진실로 모든 공직자가 서계선생의 인품처럼 자신의 욕심을 버리고 성현을의 가르침을 본받아 공명정대하게 본무에 힘쓴다면 국가와 민생은 나날이 번창하여 갈 것이다. 오늘날에도 국민의 세금을 축내는 사리사욕에 여념이 없는 공직자는 일벌백계로 본보기를 보여야 한다. 공직자가 각성하지 않고 대국민 봉사정신이 결여되어 간다면 국민이 세금을 낼 하등의 이유가 없는 것이다.

석천동 이곳저곳을 한낮동안 돌며 밭갈이하며 씨 뿌리고 김매던 농부차림의 서계선생을 떠올린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의 명저로 꼽히는 농사짓는 책인 '색경(穡經)'은 이미 2001년 농업진흥청에서 김영진 인문사회연구원이사장을 위원장으로 농학박사 12인의 감수, 국역위원이 구성되어 '고농서국역총서 1호'로 번역 출간하였다. '색경'서문에서 서계선생은 '논어'의 '자로'편에 나오는 제자 번지와의 대화에서 농사는 경험 많은 농부를 찾아 배워야 한다는 공자이야기를 인용하였다. 그리고 성군인 요(堯)임금을 섬긴 기(棄)가 후직(后稷)의 직책을 담당하여 백성에게 농사일을 가르쳤음을 밝혔다.

이는 곧 주경야독의 학문적 결실인 '사변록'과 함께 실사구시의 정신이 담긴 '색경'으로 열매를 맺어 백성이 잘 살도록 최선을 다한 선생의 정신을 그대로 나타낸 것이다. 서계선생 12대손 박용우 서계문화재단 이사장은 "이곳 주변 곳곳에는 서계 선조의 손길이 두루 미쳐있어서 앞으로 보존하는 문제가 더 중요하다"고 말한다. 문화재단이 설립된 이유도 우리 전통문화유산을 스스로 보호하고 전승한다는 취지에 있음을 덧붙여 강조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