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 12. 27 중부일보] 3. 서계종택과 서계문화재단의 설립(3/3)
...관리자 2004-12-27 1919  
 

3. 서계종택과 서계문화재단의 설립
종택(宗宅)이란 종손이 종가를 이루고 사는 집과 묘지와 대지를 아울러 포함한 말이다. 고택은 오래 전부터 유지 보전하여온 문화재적 가치를 지닌 종택을 의미한다.
서계 박세당선생이 양주 수락산 석천동을 자신의 은거지로 삼은 데에는 대체로 세가지의 이유가 있다. 그 하나는 이 땅이 아버지 박정(朴炡)이 임금으로부터 하사 받은 사패지였다는 점이고, 두 번째는 첫 부인인 조강지처 의령 남씨를 이곳 양지 바른 장자울(長子亐)에 장사하였기 때문이다. 세 번째는 이곳을 은거지로 삼아 세상을 풍미했던 생육신 매월당 김시습을 흠모하였기 때문이다.

취재진이 찾은 서계종택은 수락산을 배경으로하고 건너편 도봉산을 바라보는 위치를 자리잡고 있었다. 이곳에 남아 있는 고택은 조선후기 사대부가의 건축물로 본래는 안채와 사랑채, 행랑채가 있고 사당과 전자 등 부속 건물이 있었으나 6.25전쟁의 병화에 소실되고 현재는 사랑채와 사당인 영당만 남아 있다.

종손의 안내를 받아 영당에 이르니 아버지 박정 선생의 초상화와 나란히 서계 선생의 초상화를 안치하여 보존하고 있다. 부자유친이라 하였던가? 서계선생은 어릴 적 기억조차 없이 돌아가신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이 늘 가슴 한켠에 남아있었을 것이다. 거기에다 근 10여년간 과거시험준비를 내조한 조강지처의 상처로 큰 정신적 고통을 겪음으로써 삶의 비애를 누구보다 깊게 느꼈을 것이다.

한편 조정은 노론소론으로 갈려 언로가 막히고 임금은 충정 어린 간언을 받아들이지 않자 바른 정치를 펼 수 없다고 판단하고 끝내 굳은 결심을 하게된 것이다.

선생은 못 다한 부모공경과 아내사랑을 조금이나마 실천하기 위해서라도 미련없이 벼슬을 버리고 야인의 길으리 선택한 것이다. 그리고 부자간의 초상화가 나란히 모셔진 것도 다른 문중에 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것으로 서계선생 후손의 정신이 깃든 배려가 아닌가 싶다.

서계선생은 석천동을 근거지로 자신의 발이 미치는 곳인 개울과 골짜기 언덕, 바위 등 어느곳이나 그에 걸 맞는 이름을 명명하여 자연의 아름다움과 풍광을 찬미하며 이상세계를 실천하였다. 서계선생이 김시습 선생을 얼마나 사모했으면 그의 아호인 동봉(東奉)에 대비하여 서계(西溪)라고 자신의 아호를 지었을까. 여기에는 이미 단종 폐위의 부당성을 몸으로 보인 매월당 김시습선생의 훌륭한 발자취를 따라 그 뒤를 이어 수락산 석천동의 새 주인으로서 거듭나려는 굳은 뜻도 있었을 것이다. 바로 이것이 100회에 이르는 임금의 부름을 물리친 강한 신념으로 작용했으리라.

서계선생의 이러한 간절한 한과 굳은 의지는 후학을 지도하며 엮어낸 '사변록(思辨錄)'과 농사일을 돕는 '색경(穡經)'이라는 저술로 나타났다.

주경야독의 실사구시 정신을 유감없이 발휘하였고, 그 모든 노력이 오늘날 문화재로서의 가치를 가지고 재조명의 시기를 만나게 된 것이다.
후손들은 이를 지키고 보존하여 내려오다가 2000년도에 11대 종손 박찬호(朴贊鎬,83,서계문화재단 설립자)씨에 이르러 조상대대로 간직하여 온 유물과 고문서, 고서 등 558점의 자료를 정신문화연구의 요람인 정신문화연구원에 위탁 관리를 맡겼다. 이에 그치지 않고 2004년 1월에는 문화관광부의 인가를 받아 서계문화재단을 설립하여 아들인 12대 종손 내외에게 맡겼다.

서계문화재단의 주요 인사로는 김인걸 서울대 국사학과 교수, 박두일 종중대표, 안승준 한국정신문화원 교수, 이승규 문화재청 차장, 그리고 개인사업을 하는 이희중씨 등이 속해있는 이사진과 김신일 서울대 교수외 5인의 자문위원, 구자홍 의정부 예술의 전당 관장 외 8명의 운영위원 등이 구성돼 있다.

박용우(朴龍雨,53) 서계문화재단 이사장은 '서계에 대한 연구논문, 저술활동의 지원사업'과 '서계 저술의 주해 번역발간사업과 유물의 체계적인 관리 및 전시', '유적의 보존 및 중건사업'등을 재단이 해야할 중요사업으로 열거하며 단계적으로 추진하겠다고 말했다.

뜻대로만 된다면 문중의 영광은 물론 전통문화의 전승과 선진 국가발전의 일익을 담당하는 쾌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타 문중에도 좋은 본보기가 됨으니 물론이고 문화재를 아끼고 보호하는 정신을 고양시킴으로써 국민의식 계발에도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서계선생의 학문과 사상을 일반인들이 피부로 느낄 수 있는 부분으로 계자손문(戒子孫文)을 들 수 있다. 종부인 김인순(金仁順,51,서계문화재단 운영위원)씨가 문중 친인척에게 배포하였다며 서계할아버지의 유언이 담긴 '계자손문' 소책자를 내어놓았다. 이는 서생이 말년인 68세에 유서처럼 인생을 정리하면서 자손에게 전하는 글이다.

고령의 서계선생은 우선 자신이 눈을 감으면 장례를 간단히 치러 줄 것을 주문했으며 3년 상식(上食)을 폐지할 것, 일상 만사에 조심하여 명을 단축함이 없도록 근신할 것, 제사음식은 사치하지 않고 형편에 맞게 절약할 것, 제사음식은 사치하지 않고 형편에 맞게 절약할 것, '논어'의 말씀대로 충(忠)과 신(信)을 주장으로 매사에 정성과 신의를 저버리지 않는 사람다운 행실을 할 것, 경서와 역사책을 독파하여 고금을 통하는 착한 선비가 될것, 글을 소리내어 읽되 그 뜻과 이치를 함께 익힐 것, '중용'에 있듯이 배우고 묻고 분별함과 행동함에 독실히 할 것, 끝으로 형제간은 동기간이니 우의를 돈독히 하여 집안의 불상사가 일어나지 않도록 늘 어진 형제관계를 유지할 것등을 적었다.

이 중 3년 상식문제는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발상이므로 노론 쪽 인사들에게는 당대의 이단아로 비춰지는 빌미가 되기도 하였다.

이처럼 서계선생의 유언은 고난의 시대를 겪은 가슴으로부터 나온 진지한 내용이 담겨있는데 어찌 문중사람들에게만 해당할 일이겠는가. 오늘을 사는 모든 사람에게도 유익한 말씀으로 소중한 유훈이 아닐 수 없다.

서계선생의 학문과 신념은 두 아들 박태유, 박태보로 이어져 큰아들 박태유는 효자로써 필명을 날렸고, 둘째아들 박태보는 장원급제로 조정에 나아가 충신으로서의 본무를 다하였다. 그 후에도 가문의 전통은 많은 인걸을 배출하였는데 조선후기 실학자이며 대 문장가인 연암 박지원(朴趾源,1737~1805), 구한말 개화기를 이끌며 태극기를 처음 사용한 금릉위 박영효(朴泳孝, 1861~1939)가 그들이다.

서계고택은 문화재로서 오랜 역사와 풍상을 겪어왔다. 그리고 이제 막 후손의 지혜로운 판단으로 역사적인 보존의 길로 들어섰다. 서계문화재단의 설립이 바로 그것이다 각계의 저명인사와 유지들이 참여하여 서계선생의 실사구시(實事求是)와 정덕(正德) 이용(利用) 후생(厚生)의 정신을 연구하고 현창하여 새 시대를 여는데에 주력한다면 반남 박씨 종중의 영광은 물론 민족 문화사의 금자탑을 쌓으리라고 전망할 수 있는만큼 오늘도 장자울 일대에 부지런히 희망을 심고 있을 종가집 사람들에게 박수를 보내지 않을 수 없다.

<취재반> 글= 김홍식,명지대 건축학부 교수/ 김왕직 동양건축사연구소 소장/ 이상만 동양문화연구소 부소장/ 박정임 문화부장, 임선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