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 3. 5 경향신문] 조선 名家의 삶
...관리자 2005-04-07 1748  
 

끝내 세상에 고개를 숙이지 않는다
김학수|삼우반


'사림정치의 시대' '당쟁의 시대'로 불리는 조선의 17세기는 사회문화적으로도 큰 변화가 나타난 시기이기도 하다. 왜란, 호란을 거쳐 주자학적 질서가 자리잡으면서 부계 중심의 친족의식이 강고해져갔다. 양반 가문을 중심으로 장자 상속제가 확산되었으며 양자 제도가 널리 퍼졌다. 문벌과 가문이 형성되고 유력 가문을 중심으로 족보 간행이 활성화된 것도 이즈음이었다. 이른바 명가(名家)가 출현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 책은 17세기의 대표적 명가로 꼽히는 네 가문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부제는 '17세기 명가의 내력과 가풍'.
흔히 명가의 기준으로는 과거급제자 수, 재상.대제학 등 요직 수행 정도, 문집과 저술 분량 등을 들곤 한다. 그러나 제일 중요한 척도는 '계속성'이다. 뛰어난 조상 한두사람이 아니라 자손 대대로 가문의 훌륭한 전통이 이어져야 명가의 반열에 오르게 된다. 저자는 이를 근거로 17세기 서울, 경기 일원에서 활동했던 가문 중에서 안동김씨 청음 김상헌 가문, 반남박씨 서계 박세당 가문, 한산이씨 아계 이산해 가문, 연안이씨 월사 이정구 가문을 명가로 꼽았다.

저자는 이들 명가의 내력과 가문, 중요 인물들의 학문과 정치 활동 등을 통해 양반가문의 삶과 문화를 그려간다.
예컨대 안동김씨 청음 가문의 경우 청음 김상헌의 증조부인 김번이 문과에 합격하면서 고향 안동을 떠나 서울 장의동(지금의 자하문 인근)에 터를 잡고 김상용.상헌 형제 대에 문벌의 기초를 닦게 되었음을 들려준다. 청음 가문을 '장동김씨'라 부르는 것은 여기에서 유래한다.
이후 병자호란 때 김상용이 강화도에서 순절하고, 김상헌이 심양으로 끌려가는 일화 등을 소개하며 청음 가문의 충절을 얘기한다. 또 청음의 손자 김수흥.수항 형제가 나란히 정승에 오른 데 이어 김수항의 아들 6창(창집.창협.창흡.창업.창즙.창립)이 17세기의 학문.문화를 꽃피운 사연을 소개한다.

가문의 내력을 얘기하려면 보학(譜學)에 밝지 않으면 안된다. 명문가의 족보를 환히 꿰뚫고 가문의 역사와 가풍을 종횡무진 풀어가는 저자의 글쓰기는 놀라울 정도다. 그러나 386세대인 저자(38.한국학중앙연구원 전문위원)가 말하려는 것은 특정가문의 화려한 과거가 아니라 역사 속에서 가문의 위상과 역할이다. 그에게 보학은 역사연구 방법론의 하나일 뿐이다. 저자가 명가의 문화사적.생활사적인 측면을 강조하며 각 가문의 주요 주거지, 은거지, 별장 등을 자세히 소개한 것은 이 때문이다.

이로 인해 이 책은 족보를 들추며 옛 사람들의 가계나 따지는 고리타분한 글에서 멀찍이 벗어나 있다. 각종 문집과 고문서, 옛 그림, 초상화, 현장 답사 사진 등을 바탕으로 쓰여진 책에선 옛 사람들의 삶이 생생하게 살아난다. 단순한 명가의 이야기가 아닌 조선시대의 지성사로, 문화유산답사기로도 읽힌다. 제목은 수락산에 은거하며 학문과 저술에 몰두했던 박세당의 묘지명 글귀에서 따왔다.


1만3천원 조운찬기자sidol@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