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 3. 5 동아일보] 학문 충절 은거.. 17세기 조선의 명가
...관리자 2005-04-07 1678  
 

◇끝내 세상에 고개를 숙이지 않는다
/김학수 지음/408쪽·1만3000원·삼우반

《대제학(大提學)은 조선시대 홍문관과 예문관의

정2품 벼슬이었다. 원래 대학사(大學士)라고 불렸다. 본인이 물러나지 않는 한 종신토록 재임할 수 있었다. 학문에 뜻을 둔 선비라면 누구나 부러워하던 자리였다.

조선조를 통틀어 아버지와 아들이 대제학을 지낸 사례는 일곱 번이다.

3대까지 이어진 것은 네 번뿐이다. 첫 사례가 연안 이씨 월사(月沙) 이정구 가문이었다. 이정구는 명나라 관리가 “조선이 왜병을 끌어들여 명나라를 치려 한다”고 모함하자 사신으로 명나라에 가 그 거짓을 밝히는 글을 올려 해당 관리를 파직시킨 ‘구국(救國)의 문장가’였다. 그를 비롯해 아들 이명한, 손자 이일상이 모두 대제학을 지냈다. 이는 훗날 광산 김씨 가문에서 같은 사례가 나오기 전까지 100년 동안 전무후무한 기록이었다. 월사 3대의 치열한 저술활동은 기호(畿湖)학파의 학풍을 크게 부흥시켰다.》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에서 고문서 조사를 맡고 있는 저자는 이 책에서 17세기 서울 경기에 기반을 두었던 명가(名家)들의 내력과 가풍(家風)을 소개하고 있다. 바로 월사 집안을 비롯해 안동 김씨 청음(淸陰) 김상헌 가문, 반남 박씨 서계(西溪) 박세당 가문, 한산 이씨 아계(鵝溪) 이산해 가문이다.

17세기의 명가를 다룬 이유는 이렇다.

“16세기만 해도 외가(外家)에서 크는 게 보통이었다. 친가 외가 처가나 외손 친손을 별로 구분하지도 않았다. 노인들은 아들이 없으면 딸에게 기댔고, 외손들이 제사를 받들곤 했다. 하지만 17세기 들어 사림(士林) 정치와 주자학적 질서가 자리 잡자 부계 중심의 친족의식이 퍼졌다. 아들딸에게 같이 나눠 주던 상속이 장자(長子) 중심이 됐다. 가문의 첫 족보가 활발히 간행된 것도 이 시기였다.”

이 같은 시기에 명가의 첫 요건은 물론 벼슬이었다. 학문적 기반과 정치적 입장도 분명해야 했다. 청백(淸白)이나 효열(孝烈), 문한(文翰) 같은 고유한 가풍이 더해질 때 가격(家格)은 더욱 높아졌다.

서계 가문의 가풍은 직언하는 지성이었다. 박세당은 문과에 장원급제했지만 임금이 온천을 자주 찾으면서 나타나는 폐단을 적나라하게 지적한 뒤 벼슬길을 접었다. 아들 박태보 역시 장원급제했지만 숙종 때 인현왕후 폐출이 부당하다고 직언하다가 국문(鞫問)을 받은 뒤 유배 길에서 숨을 거뒀다. 박세당은 자신이 숨진 후 묘비에 “끝내 세상에 고개를 숙이지 않는다”는 글을 쓰게 했다. 이는 분명한 가풍이 됐다.

한편 명가들은 혼인을 통해 세가(勢家)로 발돋움하기도 했다. 청음 가문을 보면 청음의 5대조 김계권은 대제학 권맹손의 사위가 되어 자손들에게 출세의 길을 터 주었다. 현직 당상관(堂上官)의 자손은 과거를 보지 않아도 관리가 될 수 있는 문음(門蔭)의 혜택이 아들 손자는 물론 사위 외손에까지 미쳤기 때문이다. 김계권의 손자 김생해는 성종의 아들인 경명군 이침의 사위가 돼 훗날 안동 김씨 집안이 잇달아 왕실혼을 하게 되는 길을 열었다. 청음의 아버지 김극효는 좌의정 정유길의 사위가 되어 집안을 사림의 주류로 이끌었다. 그러나 이 같은 혼인만으로는 명가라 불리기에 부족했다. 청음은 청나라의 출병 요구를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청나라에 압송돼 6년 동안 옥고를 치렀다. 그는 효종이 즉위하자 북벌(北伐)의 상징이 되었다.

이번 책은 쉽지 않은 고문서 분석 작업을 통해 명가들의 생활상까지 보여 주고 있다는 점에서 노작(勞作)이라 할 만하다. 청음은 자기 인장(印章)을 손수 전각했는데 평생 100개가 넘는 인장을 소유했다. 인장을 보관하는 누각을 별도로 세우기도 했다. 그는 자기 이름을 새기고 새기면서 그 이름을 결코 더럽히지 않으리라고 다짐했던 것만 같다.


권기태 기자 kkt@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