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 2 여성조선] 종가 맏며느리 이야기
...관리자 2005-04-07 1762  
 

의정부 장암동 '반남 朴氏'종가

12대손 종부 김인순 씨

400년은 족히 살았을 은행나무 한 그루가 위풍당당하게 서 있는 수락산 자락의 서계 박세당 가옥. 사랑채만 남긴 했지만 지하철이 들어오는 의정부 도시에 250년 세월을 간직한 고택이 자리하고 있다는 사실에 마음을 뺏긴다. 평범한 단층 살림집과 '서계문화재단'이란 현판이 걸린 건물을 지나 사랑채에 다다르자 반남 박씨 12대 종손인 박용우(54) 씨가 느린 걸음으로 나와 취재진을 반긴다. 낯선 손님들이 반갑다는 것인지 모여든 수십 마리 강아지 떼와 함께. 사랑채 뒤로 보이는 60년은 족히 돼 보이는 사당을 바라보고 있자니 종부 김인순(52) 씨가 사랑채로 이끈다. 그곳에서는 백발이 성성한 11대 종손 박찬호(83) 씨가 논문 준비를 위해 한국에 들렀다는 일본인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향긋한 국화차를 내오며 김씨는 “안채가 없어서 손님 보기 좀 그러네요. 6·25전쟁 때 안채가 손상됐는데 제때 보수하지 못해서 60년대에 무너지고 사랑채만 덩그러니 남았어요.” 작년 1월 박씨는 이 일대 16만여 평의 종중(宗中) 땅을 관리하고 서계 선생과 관련된 사업을 담당하기 위해 서계문화재단을 세웠다.


처음 시집와서 대문 밖 출입을 삼가게 했던 시어머니

슬하에 두 아들을 둔 김씨는 전쟁으로 이북에서 내려온 친정아버지 밑에서 자라 종가 며느리가 어떤 자리인지 몰랐다고 한다. 그렇게 25년 전 이 집안에 들어와 10년 전 시어머니가 별세하신 후로 혼자 살림을 도맡아 왔다. 그녀는 옛 이야기에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처음 시집와서 제사 지내는 게 가장 힘들었어요. 기제사며 사당 차례, 명절까지 꼽으면 1년에 13번 정도 되는데, 들이닥치는 손님들 상 내가느라 정신이 없었죠. 제기 닦는 것도 너무 힘들고요. 지금은 동선이 짧아서 그나마 힘들지 않은 거예요.”

교육자였던 시어머니는 며느리가 괜한 소문에 휩싸이지 않도록 조심시킨 것 외에는 잔소리와 거리가 멀었다.
“처음 시집와서 대문 밖 출입을 자주 못했어요. 체통이 없어지고, 말이 돌면 소문이 많아지니까요. 개울가에 빨래하러 나갈 때도 말조심을 당부하셨죠.”
“저 사람이 와서 고생 많이 했죠. 지금이야 많이 좋아졌지만, 그리 넉넉하지도 못했어요. 시골살림에 전쟁도 치르고 했으니까요. 겨울마다 개울로 빨래하러 다닌 것도 그렇고…. 대인관계가 좋아 맏며느리로서 어떤 일이든 해결을 잘했던 것 같아요.”

힘들다고 생각해서 힘든 거라며, 모든 건 생각하기 나름이라는 그녀. 종가 며느리 김씨는 자신보다는 시어머니에 대한 자랑을 늘어놓았다. 조용조용한 성격에 사람 좋아했던 시어머니는 집안의 버팀목이었다고 한다.
“사실 종갓집의 버팀목은 안사람들이거든요. 결혼해 서울 정릉에서 살다가 58년도에 이곳으로 들어오셨죠. 안채가 무너지면서 집안에서 종손이 들어와야 한다고 했대요. 그래도 그때의 결정이 이곳을 지켜낸 거라 생각해요.”

6·25전쟁 당시 공산군이, 일제시대엔 일본군이 장악하는 바람에 살림살이가 남아나지 않았다며, 물려받은 살림이 별로 없어 아쉽다는 그녀. 하지만 앞으로 지금보다 더 열심히 고택을 가꿔서 자손대대로 이어질 수 있도록 하겠단다. 찬바람에 눈발이 날리기 시작할 무렵, 취재진에게 “우리는 여기를 떠나서는 의미가 없어요”라고 말하는 내외를 뒤로하고 자리를 떴다. 차를 몰아 나오면서 그 자리에 묵묵히 서 있는 은행나무와 어딘지 그들이 닮아 있음을, 또한 그 나무처럼 오랜 시간 같은 자리를 지키고 있으리란 생각이 스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