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대의 시간이 종부의 행주치마 위로 흐른다
...사무국 2010-02-05 1489  
 

누대의 시간이 종부의 행주치마 위로 흐른다
- 종가, 새해, 박세당, 종부, 설날


실학자 서계 박세당의 후손답게 서계 종가는 검소하게 새해를 맞이한다. 특별한 것이 없어 보여줄 것도 없다는 종부의 말에서는 겸손이 묻어난다. 특별한 것이 있어 지켜온 것이 아니라, 줄곧 지켜왔기에 특별해진 서계 종가의 새해맞이 풍경을 함께 살펴보자.

출처 | 문화나루
글 김서령_칼럼니스트 |
사진 이한구


종가에서 설은 곧 제사다. 서계 종부 김인순 씨(57세)의 새해맞이 준비는 놋 제기를 닦는 것으로 시작한다. 대를 물린 놋 제기는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행주로 몇 번 훔치면 우아하면서도 고졸한 윤기가 되살아난다. 11대를 봉사한 이 집은 정월 초하루 말고도 섣달 그믐날 저녁에 묵은 제사를 올리고 있다.
“어머님 돌아가신 후에는 간소화해 묵은 제사에는 떡국을 올리지 않고, 설날 아침에 떡국 여덟 그릇을 떠 한 대씩 제사를 네 번 지내요. 그래서 30년 동안 늘 퉁퉁 불은 떡국만 먹었어요.” 그래도 불만은 없다. ‘아무개 엄마’로 사는 것이 아니라 ‘종부’로 사는 것에 자부심을 느끼기 때문이다.

새해맞이의 분주함이 정겨운 섣달 그믐날
섣달 그믐날에는 집 안팎을 깨끗이 청소한 후, 대문 앞에 체를 거꾸로 걸어둔다. 악귀들이 범접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다. 악귀는 체를 보면 구멍 수를 일일이 세어보는 습성이 있어서 집에 못 들어온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믐날 1년 동안 쓸 조리를 한꺼번에 구입했어요. 한데 묶어방 귀퉁이나 부엌에 돈과 엿을 넣어 매달아뒀어요. 그걸로 우리 문중 전체가 새해 복을 듬뿍 받기를 빌었던 거예요.”
그믐날 밤에는 방, 마루, 부엌, 광, 변소, 마구간 등 집 안 구석구석에 식구 수만큼 등불을 걸어 환하게 밝혔다. 새해를 신성하게 맞이하려는 마음가짐이다. 서계 종가에서는 섣달 그믐날 밤에 ‘묵은세배’를 드린 후 설날 아침에 세배를 하고 있다. 한 해를 새로 맞이하는 것도 의미가 있지만, 한 해를 무탈하게 마감하는 것도 그에 못지않게 중요한 일이기 때문이다.
“섣달 그믐날 밤에 잠을 자면 눈썹이 하얗게 된다면서 아이들을 못 자게 해요. 모처럼 만난 사촌, 육촌들과 즐겁게 놀라고 꾸며낸 말이지요. 새 옷을 입은 아이들이 시끌벅적 웃고 떠들면 정말 명절다워요. 집 안 전체에 훈김이 가득해지는 느낌이라 좋아요.”

종부의 바지런함이 종가를 지켜낸다
종가를 구성하는 요건으로 대개 다음을 들 수 있다. 조상 중 누구나 알 만한 훌륭한 인물이 있어야 하고, 그분의 위패를 모시는 ‘사당’과 그 사당을 지키는 후손이 사는 ‘종택’ 그리고 사당 수호를 전담할 직계후손으로 이어져온 ‘종손’과 ‘종부’가 있어야 한다. 예전에는 종가의 여러 요소 가운데 그저 하나였겠지만, 오늘날 이라면 말이 달라진다. 종가를 유지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가 바로 ‘종부’일 것이다. 종부가 사당과 종택과 조상을 외면해버리면 아무리 삼정승 육판서가 나온 집안이라도 종가는 풀이 죽어 쓸쓸해지기 마련이다. 그래서 내 눈엔 서계 종가의 오래 묵은 마룻장에서 도는 윤기가 더 귀하고 소중하고 아름다워 보였다. 종부는 어느새 빻아왔는지 수수가루를 반죽해 번철을 펴놓고 수수부꾸미를 부쳤다. 명절에 손님이 오면 흔히 내놓는 음식이라고 한다. 반죽을 뚝뚝 떼서 능란하고 재빠르게 손바닥으로 꾹꾹 누르는 품이 예사 부인들과는 전혀 다르다. 과연 종손, 종부는 하늘이 내나 보다.종가에서 설은 곧 제사다. 서계 종가의 제례상은 실학자의 후손답게 소박하고 정갈하다. 잡채와 편육이 제상에 오르는 것이 특징이다. 이유는 잘 모른다. 그저 시어머니의 방식과 솜씨를 그대로 따르고 있을 뿐이다. 대를 물린 놋 제기는 세월이 지날수록 더 멋스러워진다.
“필, 사, 원, 종, 수, 재, 양, 승, 서, 찬, 이렇게 열 분에 돌아가신 아버님까지. 내외분 기제사와 설, 추석, 차사 그리고 시월에 지내는 시제, 사당 제사를 아직 다 그대로 지내고 있어요.” 종부는 부꾸미를 부치면서 손가락으로 조상의 항렬을 꼽는다. 조상, 사당, 종택이 하드웨어라면, 종손과 종부에 지손枝孫(원줄기에서 가지처럼 뻗어 내려간 후손)과 문중이란 소프트웨어가 있어야 진짜 종가라 할 수 있다. 서계 종가는 그러한 종가의 요건을 모조리 갖추었다. 박세당이란 조선 중기의 대학자가 있고, 위패를 모시는 사당이 있고, 종손 내외가 종택에 살고 있으며, 주변에 지손들과 반남 박씨 문중이 있다.



무엇보다 청빈과 겸허가 중요하다
서계 박세당(1629~1703)은 장원급제한 수재였다. 홍문관 교리, 이조좌랑 등에 임명됐으나 벼슬에 뜻이 없고 자연에 묻혀 글 읽는 것을 좋아했다. 17세기 중엽 조정은 노・소론의 당쟁이 유독 치열했다. 서계는 그런 다툼이 싫었던 모양이다. 마흔에 벼슬을 접고 양주 수락산 기슭(현재 서계 종가 위치)에 은거했다. 농민을 위해 농사 기술에 관한 <색경>을 쓰고, 성리학을 신랄하게 비판하는 <사변록>를 지었다. 조정이 예조판서, 이조판서, 중추부사를 제수하며 암만 불러내도 끝내 나가지 않았다.
서계 종가가 아직 제 모습을 유지하는 큰 이유가 나는 그 어름 어디쯤에 있다고 짐작한다. 조선 사회는 벼슬 없이 글만 읽는 사람을 처사라고 불렀다. 처사란 재야 학자이고 재야 학자는 세인에게 벼슬아치보다 존경을 더 많이 받았다. 벼슬길을 외면하고 초야에 묻혀 글을 읽었다는 것은 자손 교육과 집필에 전념할 수 있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래서 그 가문의 중심인물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나는 수백 년 거듭된 물걸레질로 윤이 도는 마루에 걸터앉는다. 정면에 우뚝 솟은 도봉산을 본다. 장엄하지만 사람을 압도하지는 않는 기상이다. 뒤는 수락산, 곁엔 개울이 흐른다. 귀 기울이니 물이 흘러가는 소리가 들린다. 이 개울의 이름이 바로 서계西溪다. 이 터에 자리 잡은 서계의 안목과 도봉도 수락도 아닌 자그만 개울의 이름을 따 자호를 삼은 겸허, 앵두나무와 복숭아나무를 심고 초가를 지은 청빈이 맑은 바람처럼 쇄락하게 내 가슴을 쓸고지나간다. 사랑채 왼편에는 한 칸 남짓한 누마루가 붙어 있다. 그 자리에 분합문을 위로 접어 올리고 앉으면 도봉의 연봉連峯이 그대로 이 집의 안마당이 된다. 오른쪽 시야를 가리는 고층아파트 단지는 곁으로 슬쩍 밀어내고 싶지만 그 또한 우리가 모르는 어떤 인연으로 거기 앉았을 것이다.
지금 서계 종가엔 네 식구가 살고 있다. 서계 11대 종손이던 박찬호 옹이 타계하고 이젠 여느 홑집들처럼 핵가족이 됐다. 종손 종부에겐 아들만 둘 있다. 나중 장성한 아들에게 종가의 모든 것을 물려줄 것인지 궁금했다. 오랜 고민 끝에 종택과 인근 땅 3000평으로 <서계문화재단>을 만들어 사회에 환원하기로 했단다. “우리뜰에서 문화 행사를 많이 벌였으면 좋겠어요. 얼마든지 개방할 준비가 돼 있습니다.”



설날은 모든 이에게 공평한, 그리고 특별한 날이다
설이다. 낡은 것이 가고 새로운 것이 온다. 새해를 맞는다는 것은 우리가 태초의 신성한 시간으로 돌아간다는 의미다. 설의 풍습들은 그런 초시간성을 음식과 입성과 놀이로 구체화하는 의식이다. 묵은 세배를 올리고 묵은 제사를 지내면서 그믐을 보낸 후 집둘레에 환하게 붉을 밝히고 새해 첫 새벽을 맞는다. 서계 종가에선 그 밤에 집안 여인들이 모여 희고 길쭉한 가래떡을 썬다. 내일 입을 서방님들의 도포를 손질하고 아이들의 설빔을 손질하느라 쉴 틈이 없다. 온 가문이 순백의 흰떡같이 무탈하기를 바라는 마음이 담겨 있다. 제기는 스테인리스스틸 1벌, 목제기 1벌이 따로 있지만 설에는 특별히 유기를 꺼내 쓴다. 일 년 중 최고 명절인 설이 아닌가.
세배는 동항끼리는 서로 맞절하고 아래 항렬에게는 절을 받는다. 절 받은 후엔 후손들에게 적절한 덕담 한 마디씩을 내려준다. 제사도 지내고, 세배도 드리고, 덕담도 나누고, 떡국도 먹은 후에는 모두 마당에 나와 윷놀이를 한다. 윷말을 쓰며 크게 웃는 소리에 집 안 구석구석 숨어 있었던 악귀들이 모조리 달아난다. 윷놀이에서 모를 치고 난 후 기쁨에 덩실거릴 때 마시라고 종부는 집에서 담근 술 한 동이를 사랑마루에 미리 내놓았다. 그럴 때 반남 박씨 문중 사람들의 얼굴은 꽃이 핀 것처럼 환하다. 서계 할아버지도 도봉산 저 너머에서 빙긋이 웃으시며 윷판을 기웃대신다.

출처 | 문화나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