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가의 맥을 잇다 (경기일보 경기포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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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종가의 맥을 잇다
종부와 종손의 흔들리지 않는 ‘꿋꿋함’

2011년 02월 01일 (화) 권소영 기자 ksy@ekgib.com


‘소박한 흔적만 남은 종가를 지키고 있는 종손의 꼿꼿한 풍모와 종부의 강인함에서 숙연함을 느낀다.’(이연자 저 ‘명문 종가 사람들’ 중)

단순한 ‘고택(古宅) 지킴이’가 아닌, 여전히 우리 곁에 남아 선인들의 숭고한 가르침을 전해주는 종손·종부의 자긍심은 대단하다. 특히 종갓집 사람들에게 면면히 내려오는 정신은 바로 ‘노블레스 오블리주’, 곧 높은 사회적 신분에 맞는 도덕적 의무를 다하는 일이었기에 그대로 감동이 된다.

세상 풍파와 잇속에 흔들리지 않고 올곧은 선비정신을 계승해온 종손은 각별하게 반듯한 삶을 살아야 했다. 두 칸짜리 초가도 넉넉히 여겼던 오리 정승의 370년 전 유언에 따라 종택을 박물관으로 꾸민 이원익 종가, 안채 대청마루에 애지중지 모아두었던 유물 1만여점을 소수박물관에 기증한 연안 김씨 만취당파 괴헌 종가, 공직자의 녹봉은 백성의 혈세이니만큼 검소해야 한다는 황희 정승의 청백리 정신을 가풍으로 여기며 종가를 지키는 장수 황씨 황희정승의 21대 종손의 모습은 꿋꿋하기만 했다.

어디 종부의 삶만 그렇겠는가. 종가에 시집 온 종부들의 삶 또한 고단했다. 적장자를 출산해 종손의 대가 끊기지 않게 하는 ‘최우선의 임무’ 외에, 끝나지 않는 집안정리와 일일 평균잡아 20여명이 넘게 드나드는 손님맞이와 달마다 찾아오는 기제사와 시제사까지 종가의 대·소사를 두루 챙겨야만 했다.

나이가 들고 종가의 웃어른이 세상을 떠난 뒤에도 종가의 큰 살림을 도맡는 등 문중 내 역할도 컸다. 이 때문에 여성들 사이에서 종부가 되는 일은 단순히 시집살이 이상의 자긍심과 각오를 수반했다.

그러했기에 문중의 어느집을 방문하더라도 나이가 꽤 많은 집안 어르신마저 웃목을 내주며 “종부님, 종손님 오셨냐”며 하대하지 않고 깍듯이 접대했다. 집안의 맥을 잇는 핵심인물인 종부와 종손의 값어치를 제대로 평가했던 것.

비록 오늘날에는 그 전통이 미비해 종부와 종손을 하대하거나 소홀히 대접하는 이들도 있지만 그저 웃음과 넓은 아량으로 품어내는 종부와 종손이 있기에 종가집은 언제나 건재하다.

대하 소설 ‘혼불’은 구한말 몰락해가는 양반가를 지키려는 종갓집 며느리 3대의 애환을 그린 고(故) 최명희의 소설이다. 혼불은 영혼의 밝음이다. 종가의 혼불이 꺼지지 않고 대를 이어가는 이유, 바로 종부와 종손의 옛 것을 소중히 여기는 흔들리지 않는 ‘고집’때문이 아닐까.

# 실학자 박세당 종가 12대 종부 김인순씨의 설맞이
“명절엔 기쁜 마음으로 정성으로 준비”

보름앞으로 훌쩍 다가온 설. 명절준비에 한창인 의정부시 장암동에 소재한 서계(西溪) 박세당(朴世堂) 선생의 종가를 찾은 1월18일 오전. 눈 덮인 산야를 자랑하는 깍아지른 듯한 수리산을 앞마당 삼아 설경이 멋드러지게 펼쳐진 종가는 종부의 너른 마음마냥 푸근하고 넉넉하다.

서울이면 옛 명성대로 조선의 중심지인 한양이 자리한 곳. 당연히 세도 당당한 양반댁들의 고상한 취미와 건축양식, 생활습관이 고스란히 배어있는 곳이어야하지만 경제개발의 논리에 파묻혀 전통의 한자락 남지 않고 대부분 현대사회의 자취아래 전통이 묻힌지 오래다.

그러나 그린벨트(개발제한구역)에 묶인것이 다행인지, 서계 박세당 종가의 49만5천867여㎥(15만평) 너른 부지는 옛 모양 그대로 온전하다.

물론 종택이 본 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지는 않다. 6·25전쟁 후유증으로 솟을대문도 사라지고, 안채와 행랑채마저 소실됐지만, 사랑채(경기문화재자료 제93호)는 300년 넘는 세월을 꿋꿋히 버티고 있다. 그리고 사랑채 앞 마당엔 서계선생이 300년 전에 심었다는 은행나무가 사랑채와 죽마고우마냥 같은 세월을 넘기며 자리하고 있다.

그 세월만큼 종가의 멋과 맛, 가풍을 지켜온 이가 바로 서계 박세당 종가의 종부들로 현재는 제12대 종부인 김인순씨(57)의 몫이다.

설을 보름 정도 남겨놓은 종부의 마음은 여느때보다 바쁘다. 대대로 전해오는 종가의 내림 음식을 빠짐없이 준비해야 하고, 넓디넓은 집안팎 청소며 차례 준비에 손님 챙기기까지 그야말로 몸이 열개라도 모자란다.

“설에는 떡국만 여덜 그릇을 차례상에 떠 놔야 해요. 4대 봉사(奉祀)니까 고조부 내외분부터 증조부, 조부, 시부모까지 네 차례에 걸쳐 차례를 지내고 나면 미리 끓여 놓은 떡국이 퉁퉁 불어 있죠. 시집와서 설마다 불어터진 떡국을 먹다보니 30여년이 어제일처럼 금방이네요.”

인터뷰 내내 손에서 음식을 내려놓지 못하는 종부가 사랑채 마당에서 만들어내는 구수한 냄새때문일까. 백구 두마리가 따뜻한 햇살을 등에 업고 김씨의 밑에서 연신 냄새를 맡아댄다. 그 풍경을 흐뭇하게 바라보는 종손. 그리고 종택 인근에 살아 제사때건 집안행사건 마다않고 언제든 득달같이 달려와 준다는 당숙모(김세령)와 동서(최정자) 사이는 마치 자매처럼 다정해 보인다.

이들 종가의 여인네들은 몰아치는 겨울 칼바람에 하얀 입김을 내뿜으며 추위를 견디면서도 전 지지는 손놀림엔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이 반듯한 모양을 만들어낸다. 마치 꼿꼿한 선비의 붓잡는 손놀림마냥 정교하기까지 하다.

“사실 처음 시집와서는 시어머니 가르쳐주시는대로 묵묵히 따라 배우고 익히는 것이 도리라 생각하고 열심히 배웠지요. 며느리로서의 본분을 다하는 것이 최선이라 생각했던 때였어요. 이후 각계의 교수님과 지인들께서 서계 할아버지의 공덕과 훌륭한 업적, 인품을 누누히 칭송해 보전하려는 노력을 후대에까지 이어가야한다시며 전통을 잃지 않고 지켜내온 저희 부부의 칭찬을 아끼지 않으실땐 어깨가 우쭐해지더라고요. 바로 이 ‘자긍심’이야말로 종손과 종부가 지녀야 할 제일 큰 덕목입니다.”

종부는 일년에 12번(기제사 8번, 설, 추석, 시제, 사당차례) 제사를 치른다고 한다. 제대로 된 제사의례를 지내기 때문에 이날 KBS의 ‘한국인의 밥상’ 촬영팀이 오후에 진행될 기제사의 촬영차 벌써부터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1년에 12~13번이니 30년 동안 400번도 넘게 차려냈을 제사를 종부는 어떻게 치러냈을까. 한번 제사를 지낼 때마다 1주일 전부터 준비를 해야 한단다. 제사상에는 기본으로 7과(과일 7가지)와 3전(육전, 간·천엽전, 어전), 3탕(육탕, 어탕, 소탕), 3포(육포, 어포, 대구포), 3가지 나물, 갱(북어와 고기를 넣은 국), 국수, 물김치, 식혜, 잡채, 인절미가 오른다.

“김치 담고, 놋제기 꺼내 닦고 마른 음식부터 준비하다 보면 일주일도 부족해요. 그중에서 대추·밤 굄(대추와 밤을 층층이 쌓아 올리는 것)에 가장 손이 많이 가요. 밤을 보통 20㎝ 높이로 쌓아올리는 데 한 말 반이 넘게 깎으려면 서너 명이 붙어서 하루 종일 해도 부족해요. 그래도 설엔 떡국을 내니까 3탕은 안내도 되니 훨씬 수월하죠(웃음)”

지금의 며느리들은 상상도 못할 이런 일들을 대수롭지 않게 해내는 내공의 소유자인 종부의 올해 소원은 뭘까.

“소원은 따로 없지요. 살아온 세월처럼 열심히 종가를 지켜내는 것뿐예요. 단지 바람이 있다면 시청 도시계획과와 원만한 소통을 이뤄 400년전 종택의 모습 그대로를 완벽하게 복원해 후손들에게 물려주는 것이예요. 그리고 올해 서른 한살 된 아들에게 꼭 맞는 베필이 생겨 빨리 며느리를 봤으면 좋겠습니다.”

박세당 종가 12대 종부 김인순씨와 종가 여인네들이 모여 설음식을 준비하고 있다

깨강정을 만들고 있는 김인순 종부



박용우 종손과 김인순 종부(왼쪽)

종부 여인네들이 설음식을 만드는 것을 박용우 종부가 사진으로 찍고 있다

300년된 종가 사랑채에서 김인순 종부와 김세령(오른쪽), 최정자씨(가운데)가 설음식인 수수부꾸미와 녹드전을 정성스레 만들고 있다.

▲서계 박세당은
실학의 선구자로 꼽히는 서계 박세당은 31세 때 과거에 장원급제해 관직생활을 시작했다. 예조·병조좌랑과 사간원 잠언, 사헌부 지형, 암행어사에 홍문관 학사 등을 두루 지내면서 엘리트 코스를 밟았다.
그러나 옮은 일을 위해 직언을 마다않았던 강직한 성품으로 당쟁과 유학자들의 공허한 논란에 염증을 느끼고 39세에 수락산 석천동에 은거했다. 이후 ‘색경’과 ‘사변록’ 등의 저술을 남겼다.
서계는 바로 이 책들로 인해 이단자로 규정되고, 둘째 아들 박태보가 인현왕후의 폐위를 반대하다 유배 중 객사하는 등 순탄치 않은 삶을 살았다.
바로 이 서계의 사상이 펼쳐진 곳이 서계 종택이다. 서계 당대에는 안채와 안사랑, 바깥사랑, 행랑채로 이뤄진 조선후기 전형적인 사대부가의 전통적 구조를 갖춘 곳이었다.
그러나 한국전쟁 때 상당수 건물이 소실되고 안채마저 퇴락해 지금은 사당이 있는 영각(보수작업 이뤄짐)과 사랑채만 남아있다.
서계의 12대 종손인 박용우 서계문화재단 이사장은 서계 종택 일대를 전통마을로 복원·재정립하는 방안을 추진하는 한편 책자발간, 전시회 등을 통해 서계선생의 학문과 사상을 기리는 문화사업도 벌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