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불후(三不朽)라는 말이 있으니 입덕(立德),입공(立功),입언(立言)이 바로 그것이다.
조선후기의 수많은 명가들은 학문, 공훈, 벼슬, 문장, 절의를 기반으로 그들의 가문을 일으켰다.
그러나 삼불후의 요소를 두루 갖춘 가문은 그리 많지 않았다.
반남박씨 서계가문(서계 박세당 가문, 이하 ‘서계가문’으로 약칭)의 경우,
사림(士林)의 시련기에 보여준 학덕과 인조반정기에 드러난 공훈은 누대 번영의 든든한 기반이 되었다.

여기에 ‘박세당’이라는 입언군자(立言君子)가 출현함으로써, 서계가문은 그야말로 시대가 주목하는 명가로 발돋움하게 되었다.
박세당 선생은 누구보다도 학자로서의 위치에 충실했던 학인이요, 냉철한 지성이었다.
‘저서등신(著書等身)’이라 했던가.
불혹의 나이에 수락산에 들어온 서계 박세당은 이후 연구와 저술에 몰입했다.
그러나, 주자학 일변도의 사상계는 그를 용인하지 않았다.
도리어 그를 사문난적(斯文亂賊)으로 몰았고, 그의 역저『사변록(思辨錄)』은 이단서로 규정되었다.
서계가문은 조선후기 당쟁의 정점에 위치해 있었다.
이들은 이경석, 박세채, 윤증, 최석정, 남구만 등과 함께 소론의 핵심으로 인식되었다.
특히 서계의 차자 박태보가 1689년(숙종 15) 기사환국 당시 인현왕후 폐출을 반대하다 사망함으로써
서계가문은 소론 내부에서 더욱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게 되었다.

서계가 사문난적으로 매도된 것도 이단적인 학문성향 때문이라기보다는 정쟁적 요소가 깊이 개입된 것이었다.
조선후기의 치열한 정쟁이 서계가문의 향배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쳤는가를 이해하게 해준다.